○ DOI
https://doi.org/10.47527/JNAH.2020.08.3.45
○ 저자
정경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 논문명
통화 만발발자 제천유적 추보(追補) 연구: 『통화만발발자유지고고발굴보고』를 중심으로
○ 목차
Ⅰ. 머리말
Ⅱ. 『통화만발발자유지고고발굴보고』의 편찬 및 발굴 경위
1. 편찬 과정과 시각
2. 발굴 구역과 분기
Ⅲ. 『통화만발발자유지고고발굴보고』에 나타난 분기별 변천상
1. 배달국 전⋅중기: 간결하고 담백한 소도제천문화의 원형
2. 단군조선 후기: 소도제천 전통의 지속
3. 단군조선 말기: 번속화(繁俗化)하는 소도제천문화
4. 고구려 개창기: 다시금 안정을 찾는 소도제천문화
5. 고구려 중기: 축소되는 소도제천문화
Ⅳ. 맺음말
○ 국문요약
본고는 통화 만발발자 제천유적에 대한 필자의 기존 연구에 근간 『통화만발발자유지고고발굴보고』를 추가, 만발발자 제천유적의 분기별 변천상을 새롭게 조명한 연구이다.
1기-조단(B.C.4000~B.C.3500년)의 시기, 선도사상의 요체인 삼원(천⋅지⋅인, 원⋅방⋅각)의 상징성을 요령 있게 담아낸 거대 규모의 적석단총, ‘3층원단(모자합장묘)⋅방대’가 조성되었다. 그 주인은 배달국 초 환웅족이 가져온 선진적 선도제천문화를 수용하여 토템족 웅족사회를 천손족 맥족(환웅족+웅족)사회로 바꾸어놓은 역량 있는 선인 지도자 웅녀군이었다.
1기(B.C.4000~B.C.3000년, 배달국 전⋅중기) 제천단의 거대 규모와 대비되는 간결하고 담백한 제천의 흔적은 선도제천문화의 태동기, 군더더기 없이 기본에 충실한 선도제천문화의 출발점을 보여주었다.
2기(B.C.13세기~8세기, 단군조선 후기) 만발발자의 드넓은 소도제천지에는 3층원단⋅방대의 국부에 주⋅부 제천사 2좌가 들어서 있었을 뿐이었다. 1기에 자리 잡힌 소도제천문화의 기본 틀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3기(B.C.8세기~B.C.3세기, 단군조선 말기)가 되자 소도제천문화가 크게 형식화되고 번잡해졌으며, 이전에 보이지 않던 위계성까지 생겨났다. 단군조선 말기 맥족사회의 분열⋅와해 국면 속에서 선도제천문화도 세속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4기(B.C.3세기~3세기, 고구려 개창기)가 되자 종래 번속화 방향으로 흘렀던 소도제천문화는 재차 간결화되면서 새로운 안정 국면을 맞았다. 고구려의 개창으로 맥족사회가 안정을 찾아가는 시대분위기와 맞물린 변화였다.
5기(3세기~5세기, 고구려 중기)에는 제천시설의 중첩 및 소규모화 현상, 또 제천공간의 축소 현상이 두드러졌다. 고구려 중기 선도제천문화의 위상이 서서히 약화되어가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 주제어
요하문명론, 장백산문화론, 백두산, 한국선도, 선도제천, 만발발자 유적, 홍산문화, 배달국, 맥족, 환웅천왕, 웅녀군, 소도, 3층원단⋅방대, 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