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学からみた海を介した交流三題

 : 新安海底沈没船⋅竹幕洞祭祀遺跡⋅日本 秋田城跡

 

​○ DOI

https://doi.org/10.47527/JNAH.2021.08.5.225

 

○ 저자 

大竹弘之(靑邱考古硏究院)

 

○ 목차

Ⅰ. はじめに 

Ⅱ. 新安海底沈没船

Ⅲ. 竹幕洞祭祀遺跡 

Ⅳ. 日本 秋田城跡 

Ⅴ. まとめにかえて 

 

○ 국문요약 

 本稿은 ‘考古學으로 본 바다를 통한 交流, 三題’ 라는 제목으로 바다 혹은 바닷가의 유적, 新安 海底 沈沒船, 竹幕洞 祭祀遺蹟, 日本 秋田城跡의 3例를 통해 바다를 건넌 옛 사람들의 行蹟에 대해 소개한다.

 新安海底沈沒船은 한국 全羅南道 新安 앞바다에서 1975년에 발견, 1976∼1984년에 인양 조사된 침몰선이다. 진흙에 묻힌 배 안에서 28t, 800萬枚의 中國錢과 2萬點이 넘는 陶磁器, 紫檀木과 함께 364점의 꼬리표 木簡(木牌)이 출토되었다. 木簡의 墨書에 따라 일본 京都 소재 東福寺(도후쿠지)가 1319년에 全燒되면서 重建 造營料를 얻기 위해 전세 낸 貨物船으로 밝혀졌다. 또한 至治 3(1323)년 6월에 元나라 慶元(浙江省 寧波)에서 도자기 등의 교역품과 勸進錢을 가득 싣고, 함께 일본의 勸進 僧侶과 商人들을 태우고 일본 九州 博多에 가던 중 暴風雨을 만나 漂流 끝에 高麗의 西南海域에서 침몰했을 것으로 보인다.

 竹幕洞祭祀遺跡은 전라북도 扶安郡, 西海로 돌출된 邊山半島 끝의 절벽 위에 조성된 바다 제사장이다. 1992년 조사에서 8×9m 범위에 다양의 토기 조각들이 두껍게 퇴적 된 것이 확인되어 바다를 내다보는 절벽 위에 토기를 늘어놓고 海神을 모신 露天에서의 祭祀 양상을 방불케 했다. 유물에는 3∼7세기에 이르는 다량의 재지 토기를 중심으로 大加耶계 토기와 須惠器가 포함되며, 東晉과 南朝의 中國 陶磁도 인정된다. 그 밖에 大型壺에 담긴 鐵鉾를 비롯한 鐵製 武器, 馬具, 거울 등이 있다. 그리고 주목되는 유물로 石製模造品이 있다. 141점의 有孔圓板을 비롯해 曲玉, 거울과 鐸, 劍과 刀子, 도끼와 낫, 板甲도 있다. 이들은 倭國에서 4세기 이후에 盛衰을 확인할 수 있는 왜국의 독자적인 祭祀具로 5세기 후엽∼ 6세기 초반의 유물이다. 바다의 제사는 3세기 후반 경 재지 세력들에 의해 시작되어 百濟의 領域化와 함께 발전하였고, 5세기 대에는 加耶세력도 참여하여 제사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곳에서 거행된 中國 南朝로의 航海安全을 祈願하는 바다의 祭祀에 倭人도 石製模造品을 가지고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日本 秋田城(아키타죠)跡는 蝦夷(에미시) 지역 支配 據點으로서 733년에 創建된 出羽(데와)國의 城柵이다. 秋田平野 西部, 東海를 바라보는 台地上에 입지한다. 1994년 調査에서 水洗便所遺構가 발견되었다. 3기의 便槽를 갖춰진 掘立柱建物이며 각 便槽에서 외부 沈澱槽로 연결되는 木樋暗渠가 부속한다. 8세기 후반에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沈澱槽에서는 다량의 籌木이 출토되며 堆積土壤의 分析에서 많은 寄生蟲卵 들에 섞여 條蟲卵이 뭉쳐 檢出되었다. 條蟲卵 發見에 의해 食豚 傳統이 있는 곳에서 온 사람이 使用했던 便所이었을 可能性이 提起됐다. 條蟲卵은 같은 무렵 서쪽 迎賓館인 九州 鴻臚館(고로칸)의 便所 遺構에서도 確認되어던 것으로 보아 秋田城의 예도 비슷한 性格이 예상되어 당해 시기의 大陸使節로서 渤海使가 浮上하였다. 渤海는 698년에 건국되었는데, 後漢書  등에 보이는 養豚, 食豚이 있었던 挹婁, 肅愼 지역과 겹친다. 渤海使는 727년∼919년까지 33차례 東海를 往來했으나 初期에는 北方을 경유하여 出羽國으로 향했고 795년까지 6회 해안에 도착하였다. 秋田城에는 애초부터 渤海使의 迎賓 역할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되며 여기 水洗便所遺構는 仕樣ㆍ格式 모두 賓客專用에 걸맞다고 말할

수 있다.

 

○ 주제어   

沈沒船, 木簡(木牌), 東福寺(도후쿠지), 石製模造品, 바다의 祭祀, 水洗便所遺構, 條蟲卵, 渤海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