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 DOI
https://doi.org/10.47527/JNAH.2023.02.8.289
○ 저자
서영교(중원대학교)
○ 목차
Ⅰ. 머리말
Ⅱ. 唐水軍의 고구려 上陸戰
Ⅲ. 唐의 艦隊ㆍ兵站 증강과 制海權 장악
Ⅳ. 고구려의 집중과 선택
Ⅴ. 맺음말
○ 국문요약
645년 고구려 정복에 실패한 당태종은 2년 후 신하들과 고구려 재침을 위한 논의를 했다. 수군으로 지속적인 상륙전을 감행하여 고구려를 약화시킨 후에 전면 공격을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647년 5월 이적의 육군이 고구려 남소성 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지원군이 그쪽으로 진군해갔고, 이는 당 수군의 작전에 양호한 여건을 제공했다. 그해 7월에 우진달의 함대가 요동반도의 석성(장하의 성산산성 부근에 상륙하여 그 지역을 일대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어 놓았다. 648년 설만철의 함대가 압록강에 들어섰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에 도착하였다.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박작성주 소부손이 전사했다. 그 와중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출발한 고구려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6만의 병력이 뒤엉켜 싸우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같은 해 4월 오호도(발해만 황성도)의 진장 고신감이 고구려 역산 지역에 상륙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당의 무작위 공격은 고구려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육지에서 적의 공격을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이었다. 어디를 공격해 올지 몰라 방어의 밀도와 효율성이 저하되었다. 예상 방어지역은 확장되어 갔고, 그러면서 거의 모든 해안지역이 소모를 강요받았다.
동시에 당은 대규모의 수군 증강을 단행했다. 648년 7월-8월 검남도(사천성)와 월주, 무주, 홍주에 황제의 선박 건조 명령이 하달되었다. 해선과 쌍방선 1100척을 건조하게 했으며, 9월에 강남 12주에서해선 3백 50척을 더 만들게 했다.
당의 수군 증강이 인위적인 후천적 요인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선천적 요소도 당 내부에 있었다. 중국은 항구에 적합하고 해양개척에 용이한 배후지가 매우 거대하다. 강회지역에는 수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고, 그들은 수로를 통해 부를 추구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었다.
649년 5월 29일 당태종이 사망하면서 수군 증강은 일시 정지되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잘 훈련된 수군, 적재적소에 건설된 해상병참기지들, 숙련된 선박공장들로 들어찬 거대한 조선소들과 이를 운영ㆍ관리하는 시스템을 물려받은 당고종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660년 당고종은 병력 13만을 태운 1800척의 함대를 보내 10일만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1년 7월에 소정방이 이끄는 수군을 대동강에 상륙시켜 평양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663년 8월 28일 당수군은 백촌강에서 왜국함대 400척을 전소시켰다.
당수군에 대항한 고구려 수군 활동이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을 반영하는 것인가. 647-648년 당수군이 고구려 연안지역을 유린하고 다녔고, 661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포위했는데도 그러했다.
수군 증강은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 수명이 7년 정도인 선박은 요새보다 소모성이 강하며, 일정 수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조선을 해야 한다. 고구려가 당과 함대 건조경쟁을 할 수 없다. 연개소문은 수군 증강을 국정과제로 선택하지 않고 비대칭적 대항책으로 일관했다. 그는 새로 성을 쌓고 성책을 증설ㆍ수리하는데 열중했다.
그 결과 해상에서 불확실성이 증가했다. 이는 수로로 연결된 대성(건안ㆍ비사ㆍ욕이ㆍ평양)들 사이의 물류에 타격을 주어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켰을 것이다. 당의 제해권 장악이 고구려가 기울어지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 주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