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I

https://doi.org/10.47527/JNAH.2025.08.13.127

 

▎목차

Ⅰ. 머리말 

Ⅱ. 4세기말ㆍ5세기초 한반도∼일본열도의 부여족과 ‘범부여족 연합론(부도복건론)’에 기반한 박제상의 대외활동 

   1. 양대 부여계(고구려계ㆍ백제계)의 대립과 백제계 왜국의 위상 

   2. 범부여족 연합론(부도복건론)에 기반한 박제상의 도왜

Ⅲ. 일본열도 부여계 왜족의 정치ㆍ문화적 분립과 탈천손문화의 방향 

   1. 일본열도 부여계 왜족의 열세와 부여족의 정체성 폐기

   2. 숭신왕조의 천황주의 채택과 탈천손문화의 방향 

Ⅳ. 맺음말

 

▎국문요약

본고에서는 부여계 도래인의 후손에 의해 개척되었던 왜(倭)가 패권적 신분질서를 공고히 해나가면서 부도복건론(符都復建論)을 중심으로 한 범부여족 연합에서 정치⋅ 문화적으로 분리되어 나간 과정을 연구했다.

4∼5세기는 이러한 분립이 공고히 자리잡은 시기라 볼 수 있다. 박제상기사를 중심으로 주로 4∼5세기 신라와 왜의 대외관계에 대해 다룰 것이다. 박제상기사는 식민사학 의 소재로 쓰였으며, 현재까지도 일인학자에 의해 신라에 대한 왜의 우위로 해석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이에 박제상에 관한 제 사서를 비교하고, 고고학적 증거와 관련 기사를 전후한 상황을 분석하여 다시금 재해석했다. 

그 결과, 왜에 파견한 미사흔의 질자(質子)로서의 성격과 부여족 국가간 통혼(通婚)을 비롯한 정치ㆍ군사적 통호 및 대립관계를 통해 오히려 신라에 비해 왜가 열세였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라정벌기사는 이러한 것을 감추기 위한 변명 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었다.

왜가 부여족 연합에서 이탈한 원인은 부도복건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고 눈에 보이는 패권적신분질서에 천착해 나간 것에서 비롯했다. 여기에, 삼국에서도 가장 한미한 수준이 라 여겼던 신라에게 조차 무시를 당했다고 여기며 점차 정치ㆍ문화적으로 분립되어 갔다. 

 

▎주제어

한국선도, 천손문화, 박제상, 부도복건론, 부도지, 범부여족 연합론, 다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