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OI
https://doi.org/10.47527/JNAH.2020.08.3.1
○ 저자
최몽룡(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논문명
中國 陝西省 神木縣 石峁村의 石峁와 皇城臺 유적: 신화나 전설에서 역사로 진입한 중국의 유적과 檀君朝鮮
○ 국문요약
중국은 中華文明探原大工程을 통하여 황하를 중심으로 신화를 역사로 점차 탈바꿈시키고 있으며, 또한 이를 통해 중국 한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정신적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황하가 관통하는 陝西省 黃陵縣 橋山 黃帝陵과 湖南省 株洲 炎陵縣 鹿原鎭의 炎帝陵에서 淸明節에 국가 단위의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또 현재의 한족이 모두 신화⋅전설상의 炎帝와 黃帝의 同系 자손이라는 中華文明探原大工程이라는 운동을 벌려 종전 중국의 역사가 기원전 2200년경 禹임금이 세운 夏나라보다 약 1,000년 더 올라가는 三皇五帝의 시절까지 소급시키려 하고 있다. 때맞추어 山西省 吉縣 驪山 頂峰에 위치한 人祖廟안에 중국에서 인간을 창조한 여신으로 알려진 太昊 伏羲와 함께 봉안된 女媧像을 비롯해 중국의 三皇五帝의 경우 山西省 吉縣 驪山 頂峰에 위치한 人祖廟, 河南省 濮陽縣 城西南隅 西水坡, 山西省 襄汾縣 陶寺, 安徽省 蚌埠市 塗山禹會村과 陝西省 神木縣 石峁村 유적에서 기록과 전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계속나오고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陝西省 神木縣 石峁村의 石峁와 皇城臺 유적도 그러한 추세에 맞추어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북위 38도 33분 동경 110도 18분의 황하 중ㆍ하류 일대陝北 黃土高原 北部邊緣 陝西省 榆林市 神木縣 高家堡鎭 禿尾河 北側山 석묘(石峁, 스마오, shi mǎo)村의 石峁와 皇城臺유적에서 夯土(版築)와 灰반죽(mortar)을 이용해 石城을 쌓은 龍山文化(기원전 2500년 - 기원 2200년) 말기 - 夏(기원전 2200년 - 기원전1750년)시대에 속하는 4,300-4,000년 전, 다시 말해 기원전 2350년-기원전 1950년경(서기 2019년 9월 이 유적의 C14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은 기원전 2200년-기원전 1900년의 사이가 나왔으며, 현장에서는 기원전 2300년-기원전 1800년 사이 500여년 간의 유적으로 설명)의 龍山晚期 - 夏早期의 石城과 정상의 石壁으로 구획된 ‘下沈院式 大形宮殿’인 皇城臺를 비롯해 ‘內城과 外城’의 三重城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석담에 밀집되어 나타나는 나무로 짜 넣은 ‘紝木孔洞’은 宋人 李誡所의 營造法式에 나오는 ‘紝木孔洞’[破墻而出로 紝木을 사용하여 비계목[飛階木, 塔架法, 搭建框架, Build framework)을 세워 작업무게를 감당(承擔重量, Bear the weight)함]으로 아래에서 위로 오르는 계단상(層階壇狀)으로 만들려는 构筑 방식으로 보인다. 石峁와 皇城臺 유적(기원전 2200년 - 기원전 1900년)에서 발견된 陶器는 龍山文化를 대표하는 끓이거나(煮) 찌는(烝) 취사도구인 ‘空三足器’인 鬲(li)이 위주인데 중요한 것은 한국의 청동기시대 조기와 관련된 ‘花邊口緣 또는 刻劃齒輪狀花邊(突帶紋)’도 눈에 띈다. 이는 우리나라 청동기 조기(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500년)에 보이는 突帶紋土器(刻目突帶文土器)의 장식과 유사한 점이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 조기로 넘어오는 과도기시대에 器形은 빗살문(즐문)토기이나 토기 표면에 문양이 전혀 없는 무문토기 또는 태토(바탕흙)가 무문토기인 경우가 확인된다. 중국의 삼황오제의 경우 山西省 吉縣 驪山 頂峰에 위치한 皇城臺, 河南省 濮陽縣 城西南隅 西水坡, 山西省 襄汾縣 陶寺, 安徽省 蚌埠市 塗山 禹會村과 陝西省 神木縣 石峁村 유적에서 기록과 전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단군조선을 포함하는 신화 상의 한국 상고사가 역사적 현실로 진입하게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 주제어
中華文明探原大工程, 石峁遺蹟, 皇城臺, 三皇五帝, 檀君朝鮮, 西水坡遺蹟, 陶寺遺蹟, 禹墟, 考古學, 新石器時代, 靑銅器時代, 古朝鮮, 中華文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