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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세미나]

제 3회 학술대회 “동북아문명과 백두산”

학회는 6월 13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국학원에서 <동북아문명과 백두산>이라는 주제로 제3회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롯데장학재단과 국학원의 후원으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는 “동북아문명과 백두산”관련 총 3개의 주제 발표로 이루어졌으며, 충북대학교 김용환 교수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 1910~1920년대 식민지조선 지식인들의 ‘백두산=단군발상지’론과 ‘만주=단군강역’론에 대해 발표하는 이명종 교수


첫 번째 발표자는 강릉원주대학교 이명종 교수로, 「1910⋅1920년대의 '백두산=단군탄강지'론과 '만주=단군강역'론」에 대한 주제발표를 하였다. 이명종 교수는 “백두산을 단군의 발상지, 만주를 단군조선의 도읍지와 강역으로 보는 견해, 또 만주족을 단군의 후예로 보는 견해는 1910·20년대 조선지식인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표명되기 시작하였고 1930·40년대에 이르면 만주가 조선 역사의 발상지이고 요람이었다는 주장이 일반화되었다”며 이어 “강역의 크기는 만주를 향한 영토적 욕망을 나타낸 것이라기 보다는 조선민족이 유사 이래로 독립적인 영토 국가를 영위하며 존재했다는 점을 증빙하는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라며 “‘만주=단군강역’이라는 담론 속에는 조선 지식인들의 나라를 잃은 현실과 민족 독립을 향한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동북아의 백산신앙과 백두산에 대해 발표 중인 김철수 교수


두 번째는 중원대학교 김철수 교수가 「동북아의 백산신앙과 백두산」에 대하여 발표를 하였다.
김철수 교수는 “백산신앙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으로 동북아 창세역사 문화의 본원지이며 한민족의 소도제천의 본향”이라며 “이곳을 중심으로 환웅과 단군의 제천의례가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백산신앙은 시간이 흘러 백두산의 소도를 본보기로 이곳 저곳에 소도가 세워졌는데 특히 바다 건너 일본열도로 전해져 일본의 백산신앙의 원류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일본에는 예로부터 산을 신성시한 산악신앙, 즉 백산신앙이 있었으며, 현재 일본전역을 통틀어 2700여곳에 달하는 백산이 있다. 이러한 백산에는 백산신사(시라야마히메 신사)가 세워져 백산신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교수는 “이 신사의 주신은 고구려 신으로 알려진 구쿠리히메신이며 환웅의 숭배 흔적도 남아있다”며 “백산은 단순히 산의 정상부가 하얀 산이 아니라 백두산처럼 외경의 대상이었고 신성한 산으로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며, 쓰시마의 솟도신앙, 일본 신도의 히모로기 등은 백산신앙이 일본열도로 흘러들어간 증거로 볼 수 있다”고 하여 고대 한국의 사상과 문화가 일본열도로 흘러갔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문명과 한민족의 형성을 주제로 발표 중인 정경희 교수


마지막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정경희 교수가 「백두산의 제천유적과 동북아문명」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였다. 

정경희 교수는 “한민족 기원에 대한 연구는 일제시기 일본인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한민족 시베리아 기원설’로 정리될 수 있는데, 광복 이후에도 답습이 되어 한국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정교수는 “특히 1990년대 중국측에 의해 조사·발굴된 백두산 서편 일대의 고제단군과 한국측 선도문헌의 내용들이 합치되고 있기에 이를 통해 서기전 4000년 무렵 백두산 서편지역에서 시작된 배달국 개창과 한민족(예맥족) 형성 과정을 정리해보게 된다”며 “이러한 시도는 고고학과 선도문헌을 접목하여 한민족의 형성 과정을 새롭게 해석한 시도로서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전체 토론 및 질의 응답

주제발표에 이어 종합토론 및 질의응답이 한 시간 가량 이어졌다. 학술대회는 참석자 모두의 발열체크와 명단 작성 및 손소독과 마스크착용, 거리두기 등 코로나19바이러스 감염증 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하였다. 주제발표는 학회 유튜브 ‘동북아고대역사’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등록자

관리자

등록일
2020-06-17 23:33
조회
1,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