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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지역 - 선‧불(仙‧佛) 융합과 화랑도 문화의 현장을 가다①


<선사시대와 고대 역사 유적 답사>


울산 지역 - 선‧불(仙‧佛) 융합과 화랑도 문화의 현장을 가다

 

허성관(한국유라시아연구원 원장)

 

 

한국유라시아연구원은 연간 2~3회 국내 및 해외 문화유산 답사를 진행해오고 있다. 우리 역사가 다른 나라에 비해 워낙 오래되었기에 가는 곳마다 많은 유적이 남아 있었다. 어떤 곳은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어떤 곳은 표지판조차 없거나 녹슬고 찌그러져서 아쉬웠다. 때로는 아무런 표식이 없어 지번으로 구글어스에서 검색하여 찾느라 헤매기도 했다. 이 모든 유적은 아득한 옛날 우리 조상들이 왜 이곳에 있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나아가서 조상들의 당시 삶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를 유추할 수 있는 현장이다. 감동 그 자체인 현장도 있었고, 이곳이 그곳이구나 하고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곳도 있었고, 전혀 몰랐던 역사를 알려준 유적도 있었고, 화나고 분한 현장도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답사가 뭔가 아쉬워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번부터 부족하나마 답사기를 쓰기로 한다.

울산 지역은 우리 전통사상 한국선도와 외래 종교 불교의 융합 현장

이번 답사(2025년 12월 6일~7일 1박2일)는 울산 지역이다. 지난 7월 25일 유네스코는 울산 반구천 일대 바위에 새긴 암각화(petroglyph)를 인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를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한국유라시아연구원 주관으로 10월에 울산박물관에서 있었다. 좋은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학술대회 후 울산 지역 선사시대와 고대 유적을 본격적으로 답사해 보자는 논의가 모아져 이번 답사에 나섰다. 답사 주제는 ‘울산 지역 - 선‧불(仙‧佛) 습합(習合)과 화랑도 문화의 현장’이다. 선‧불(仙‧佛)은 우리 전통사상 선도(仙道)와 불교이다. 습합(習合)은 일본에서 주로 신도와 불교의 융합 현상을 표현하는 학술용어지만 우리에게는 생소하다. 챗GPT에 물어보니 일본 헤이안(8∼12세기) 시대부터 사용한 용어다. 습합 대신 융합을 써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울산 지역은 우리 전통사상 한국선도와 외래 종교 불교의 융합이 이루어진 현장이다. 융합의 결과 화랑도 정신이 구현되어 고대 국가 신라의 융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 정신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선‧불 융합 현장이 이번 답사 대상이다.

답사 기간은 2025년 12월 5∼6일 이틀이다. 참가자는 한국유라시아연구원 회원 15명이다. 회원들이 전국 각지에 살고 있어 울산역에 12시 집합하여 출발하기로 했다. 어렵게 KTX 표를 구했다. 날씨가 춥다는 예보가 있어 옷을 단단히 챙겨입고 나섰다. 9시 28분 부산행 KTX에 올랐다. 쌀쌀하면서 맑은 하늘이다. 바람 한 점 없어 한강 물 흐름이 거울처럼 매끄럽게 보인다. 봄 경부선 KTX 여행은 눈이 호강하는 시간이다. 평택을 지나면서 이어지는 과수원에 봄꽃이 만발하고 꽃향기가 차 안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겨울이라 낙엽 진 차창에 스치는 나뭇가지는 초라하다. 갈색 들판과 마른풀은 후줄근하고 가난해 보인다. 예정 시각 11시 54분보다 18분 늦게 울산역에 도착했다. 일행 중 제일 늦었다. 금천구청역 근처에서 열차 간격을 조정하느라 서행한 탓이다. 점심은 소대봉 박사가 준비해 온 샌드위치로 기차에서 해결했다.

이번에 답사할 곳은 (6일) 신화리 유적 ⭢ 오진리 바위 그늘 유적 ⭢ 운문사와 가슬갑사 ⭢ 박제상 유적지 ⭢ (7일) 천전리 유적과 반고사 터 ⭢ 선바위 ⭢ 장구산성 ⭢ 태화루와 황용연 ⭢ 은월사 ⭢ 연암동 환호 유적이다. 운문사는 30여 년 전에 관람한 비구니 절이다, 천전리 유적은 지난봄에도 답사했다. 박제상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는 정도이고, 이 외 유적은 들은 적도 없는 곳이다. 다행히 한국유라시아연구원 연구원들이 답사 예정 유적지에 관해 자발적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책자로 묶어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 신화리 유적의 하나로 울산역 광장에 복원해 놓은 움집. 사진 한국유라시아연구원


대절한 25인승 소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첫 답사지 신화리(神華理)로 가고자 버스를 타려니 울산역 자리가 신화리 유적지라고 한다. 울주군 삼남면에 속한 지역인데 100m 정도 높이 야산 경사면이 유적지라고 한다. KTX 울산역을 건설하면서 발굴 조사한 결과 울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한국에는 구석기가 없었다고 강변하던 일제 제국주의 역사학자들 주장이 연천 전곡리 유적 발견으로 무너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곳 울산역에 구석기 문화가 있었다! 구석기뿐만 아니라 신석기, 청동기, 단군조선, 삼한 시기 유물이 나와 우리 조상들이 태곳적부터 거주했던 큰 유적이다. 특히, 다양한 석기가 발견되고 돌날이 1,000여 개 출토되어 이곳에 석기 공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신화리는 태화강 상류 지류 두 개가 합류하는 곳이어서 주변 지역과 쉽게 오갈 수 있고, 계곡 인근에 농지도 넉넉해서 사람 살기 좋은 지역이다. 조선시대 이곳 지명이 쌍수정리(雙水亭理)였는데 두물머리(양수리)라는 뜻이다. 아득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좋은 곳에 삶의 터전을 잡는 인간의 지혜는 차이가 없어 보인다.

복원하거나 보존한 유적이 전혀 없으니 볼 것도 없다. ‘이곳이 그곳이구나’ 정도 느낌밖에 없는 답사 아닌 답사다. 그런데 울산역 건물 정문을 나서면 오른쪽에 옛날 옛적 사람이 살던 움집(?) 한 채를 복원해 놓았다(그림 1). 설명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구석기 사람이 살던 집이라고 짐작이 간다. 이전에 여러 번 울산역에 내렸을 때 ‘웬 움집이 여기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신화리 유적 표지 유물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조상들이 살던 터전이 송두리째 사라졌으니 아쉽다. 울산이 산업화 이후 번창한 도시이지만 신화리는 태곳적부터 많은 사람이 거주해 온 지역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서 있다. 이 역 광장에 신화리 유적 관련 소박한 박물관을 마련해서 전시물을 알차게 채우면 울산의 유구한 역사를 알려 도시 품격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 강 건너에서 바라본 오진리 바위 그늘 유적. 사진 한국유라시아연구원


다음 답사지 ‘오진리 바위 그늘 유적’은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에 있다. 울산역에서 언양읍을 지나 영남알프스를 잇는 고개 운문령을 넘어야 청도군 운문면이다. 운문면은 운문사에서 유래한 지명일 것이다. 30여 년 전에 이 길을 몇 번 지난 적이 있다. 가파르고 높은 고갯길을 넘는다. 오르막길 끝이 운문터널이고 내리막길은 계곡 오른편이다. 운문(雲門)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리라. 이마도 이 고개가 높아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려면 고개 아래 낀 구름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 고갯마루가 문으로 여겨져 유래한 이름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운문천을 따라 제법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을 거의 다 내려가니 오진리다. 여기서 냇가 폭이 200m 정도로 넓어진다. 우회전해서 다리를 건너니 산골 마을이다. 마을 지형으로 보아 유적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강 오른쪽에 유적이 있을 것 같아 되짚어 나와 조금 가니 바위 그늘 유적 안내판이 있었다. 강을 건널 수가 없어 건너편 강가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 있는 유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산리식 토기’, 한반도 남부 지역이 환동해문화권임을 증거하다

바위가 사진에서 보듯이 처마처럼 튀어나와 바위 그늘 유적이라고 한다. 동굴 유적인데 크기가 높이 2.5m 너비 15.5m 깊이 3.5m 정도인 신석기 이후 오랫동안 사용한 주거지로 확인되었다. 이 동굴에서 즐문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다른 토기와 문양과 모양이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오산리식 토기’로 불린다. 이 토기는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에서 출토된 토기와 함께 서기전 5,000년경의 융기문 토기보다 앞선 시기에 만든 토기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 토기로 알려져 있다. 이 토기와 고산리식 토기는 흑룡강 하류 신석기 토기와 닮아서 한반도 남부 지역이 환동해문화권에 속해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토기 한 조각에서 신석기 시대 환동해문화권의 한 부분을 설정했으니! 1만 년 전 이 궁벽한 오지에도 사람이 살았는데 당시 넓은 평원 지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았을까?

10여 km 달려 운문사 입구에 도착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들어갈 수 없단다. 소형 버스이고, 공부하려 답사왔다고 잘 설명하여 운문사 일주문 주차장까지 들어와 내렸다. 우리나라 절은 대부분 산기슭에 있다. 그러나 운문사는 드물게 평지에 있는 절이다. 일주문에 虎踞山雲門寺(호거산운문사)라고 현판이 붙어 있다. 잘 쓴 글씨지만 무시무시한 현판이다. 踞자가 ’웅크릴 거‘이니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구름이 가득한 산으로 들어가는 문에 세운 절‘이라는 뜻으로 풀이해 본다. 일제강점기까지 우리나라 깊은 산에는 호랑이가 우글거렸다. 지금은 겁주는 현판은 아니다. 운문사 경내는 담장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다. 북쪽 큰 전각 두 채는 근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남쪽은 옛 운문사이다. 지금은 비구니 승가대학도 여기에 있다. 동행한 사람 대부분이 운문사를 관람한 적이 있어 운문사 내부는 생략하고 가슬갑사 터로 향했다.
 

 ▲ 운문사 일주문과 현판. 사진 한국유라시아연구원


신라 진흥왕 27년(서기 566년) 한 신승(神僧)이 운문사를 창건하고 운문사 동서남북에 절을 지었다. 중심에 대작갑사(大鵲岬寺 지금의 운문사),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에 소작갑사(所鵲岬寺),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를 지었다. 岬(갑)은 골짜기 또는 산 중턱을 의미하는 글자이므로 절 위치가 산골임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岬이 우리말 ‘곳‘의 이두 표기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가슬갑사는 지금 터만 남아 있다. 운문사 뒤 약간 동북쪽으로 깔끔하게 정비한 생태탐방길로 걸어 올라갔다. 왼쪽으로 자동차길이고 오른쪽은 계곡이다. 계곡에 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길인데 더할 수 없이 청량한 길이다. 아마도 내 수명이 석 달쯤 늘어났을 수도 있겠다. 대략 3천 걸음 정도 가니 사리암 주차장이다. 주차장과 편의시설도 깔끔하다.

왜 여기 없어진 가슬갑사 터를 찾아왔는가? 신라시대 고승 원광(圓光)법사가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화랑도 계율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준 곳이기 때문이다. 화랑은 세속오계를 지키며 심신을 수련하여 신라 왕국의 지도자로 성장했고, 삼국통일을 실현한 중심 집단이었다. 세속오계는 오늘날에도 우리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사상이다. 이러니 가슬갑사는 우리 사상사의 변곡점을 만든 현장이다. 탐방로 관리소 직원은 30분을 더 가야 가슬갑사 터라고 한다. 게다기 다른 길도 있으나 돌아가는 길이라 시간이 한참 더 걸리고, 예약이 있어야 정비된 탐방로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산골에는 해가 빨리 진다. 내려올 때 어두워져 위험할 것이다. 역사 현장 답사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그런데 안내 표지판에는 절터 표시가 없다. 신기하게도 이 산에 담비가 산다고 소개한다. 동‧서양에서 담비 가죽은 최고급 모피다. 1950년대까지도 담비는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멸종위기 2급 동물이다. 호랑이가 호령하던 산에는 이제 담비가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구나.
 

 ▲가슬갑사 터 표시가 없는 사리암 주차장 안내판. 사진 한국유라시아연구원


원광 스님에 관한 옛 기록은 엇갈린다. 언제 태어났는지, 중국 남조(南朝) 진(陳)나라로 공부하러 가기 전에 스님이 되었는지 가서 스님이 되었는지, 성이 박(朴)씨인지 설씨(薛)씨인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기 600년에 귀국했고, 귀국 후 가슬갑사에 머물렀고, 640년 황룡사에서 입적했으며, 선도(仙道) 유학 불교 제자백가 역사 등을 폭넓게 공부한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문장이 탁월했다는 사실은 일치한다. 특히, 《삼국유사》는 스님이 중국에 공부하러 가기 전에 “현유(玄儒)를 두루 공부하여 비교하고 자사(子史)도 검토하여 바로 잡았다(挍獵玄儒討讎子史)’고 전한다. 玄儒에서 玄은 최치원 선생이 말한 현묘지도(玄妙之道)로서 선도, 儒는 유학, 子史는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역사를 의미할 것이다. 불교를 공부했다는 표현이 없으니 아마도 중국 진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면서 출가했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보면 원광 스님은 스님이기 이전에 선가(仙家)였을 것이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 스님도 스님이면서 선가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1277∼1281년 이곳 운문사 주지로 주석했으니 운문사가 선가와 관련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운문사에 화랑연구소가 있다.

우리 역사에서 불교가 들어왔을 때 국가가 공인하고 민중도 쉽게 받아들였다. 물론 당시 전통사상과 갈등이 있었다. 불교의 핵심을 소박하게 이해하면 번뇌에서 해탈하여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착한 사람은 통치자가 다스리기 편한 사람이다. 이러니 통치자가 불교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가 발생하면 착한 사람만으로는 국난 극복이 어렵다.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이 불가에서 말하는 자리행(自利行)일 것이다. 국난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공동체를 지키려는 정신이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자리행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공동체를 지키려는 정신의 본질이 이타행(利他行)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자리행은 소승불교의 핵심이고 이타행은 대승불교의 종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시배달국 이래 우리 민족이 지켜온 사상은 선도(仙道)다. 선도의 가르침은 수련을 통해 심신이 착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성통(性通)하여 공동체에 이로운 삶을 사는 공완(功完)을 실천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구현하는 것이다. 자리행에 치중하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선가 처지에서는 홍익인간을 구현할 대상이 없어지게 된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는 5세기 초반이고, 527년 이차돈 죽음으로 공인되었다. 이차돈 죽음 자체가 선도와 불교 사이에 치열한 갈등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나라가 공인하자 왕실과 민중이 불교를 믿게 되어 선도의 가르침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원광 스님이 살았던 6세기 중반∼7세기 중반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아 신라로서는 국가 위기에 직면한 형국이었다.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국가 공동체에 헌신하는 강력한 사상적 무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 홍익인간 이념에 투철한 선가들이 나서서 불교의 자리행과 선도의 공완을 융합한 결과물이 원광 스님이 내려준 세속오계라고 할 수 있다.

세속오계는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붕우유신(朋友有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 학자들은 이 5계가 불교 또는 유교에서 기원한 가르침으로 보지만 피상적인 관찰이다. 원광 스님이 불교의 보살계 대신에 세속오계를 내려준다고 했으므로 세속오계가 불교 계율이 아니다. 특히, 불교 신자가 지켜야 할 첫째 계율 불살생(不殺生)은 살생유택과 함께 할 수 없다. 유교의 오륜(五倫) 親‧義‧別‧序‧信과 오덕(五德) 仁‧義‧禮‧智‧信은 세속오계와 오(五)만 같을 뿐이다. 오덕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보편적이고 내면적인 도덕성이고, 오륜은 가족 중심적인 윤리다. 반면에 세속오계의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은 위기 국면에서 지켜야 할 계율이므로 유교에서 강조하는 윤리와 도덕과는 차원이 다르다. 세속오계 중 사군이충(事君以忠)에서 충을 임금에 대한 충성이 아닌 공동체에 대한 충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임금에 대한 충성이 공동체에 대한 충성이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공동체(나라)에 대한 충성은 항상 임금에 대한 충성이 되기 때문이다.

원광 스님의 세속오계는 단군조선에서 소도(蘇塗) 옆에 세운 경당(扃堂)에서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는 오상(五常) 忠‧孝‧信‧勇‧仁(《태백일사(太白逸史)》 삼신오제본기 중)을 현실에 맞추어 구체화한 것이다. 임전무퇴는 勇, 살생유택은 仁이기 때문이다. 원광 스님은 현실에서 세력을 확대해 가는 불교의 자리행에 선도의 가르침인 오상을 주체적으로 융합하여 국난을 극복하여 홍익인간을 구현하는 새로운 사상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세속오계 가르침으로 불교는 호국불교로 자리매김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님들도 칼을 들고 나섰다. 사서에 전하는 바와 같이 세속오계로 무장한 화랑들에서 현명한 신하와 유능한 장수들이 나왔다. 화랑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엘리트의 모범이다.

이러니 가슬갑사는 화랑 문화의 현장으로 우리 역사에서 항상 기려야 할 터다.

세속오계의 현장을 떠나 박제상(朴堤上 363∼419) 유적을 찾아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로 향했다. 다시 운문령을 넘어 언양읍을 지나 30분 정도 걸렸다. 박제상은 신라 5대 파사왕 후손으로 조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勿品波珍飡) 물계자(勿稽子)이고, 아들이 백결(百結)선생이다. 백결선생은 우리 교과서에 나오는 거문고에 통달한 음악가다. 물계자는 탁월한 선가로서 선도를 현실 정치에 구현한 인물이다. 박제상 자신은 《요정징심록연의(要正澄心錄演義)》를 지은 선도의 위대한 스승이다. 이 책은 우리 태고사와 선도를 서술한 책인데 영해 박씨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온 우리 민족의 소중한 유산이다. 마고 할머니 창세 이야기도 이 책에 실려 있다.

박제상(363∼419)이 살았단 시기는 신라 17대 나물왕(재위 356∼402) 18대 실성왕(재위 402∼417) 19대 눌지왕(재위 417∼458) 기간이다. 관직으로 삽량주(歃良州) 간(干)을 지냈다. 삽량주는 지금 경상남도 양산이고, 간은 지역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이다. 실성왕은 나물왕 아들이 아니고 조카였다. 즉위 후 나물왕 세 아들 중 복호를 고구려에, 미사흔을 왜(倭)에 인질로 보냈다. 정치적 격변 과정에 나물왕 장남 눌지가 실성왕을 살해하고 눌지왕이 되었다. 박제상은 눌지왕 편에 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눌지왕과 박제상은 모두 실성왕의 사위였다. 박제상은 눌지왕 명을 받아 먼저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재위 412∼491)을 설득하여 복호를 데려오고, 다음에 왜에 가서 미사흔을 무사히 신라로 탈출시킨 후 자신은 왜에서 화형당했다. 이로써 박제상은 신라 만고 충신으로 칭송받았다. 치술령(鵄述領 올빼미 고개)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애타게 남편을 기다리던 박제상 부인은 망부석으로 변하고 두 딸은 돌이 되었다는 전설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당시 왜가 신라에 인질을 요구할 정도로 강력한 고대 왕국이 아니었는데 인질을 보냈다는 기록에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눌지왕은 박제상을 기려 신라 최고 관등 서불한(舒弗邯 소뿔칸의 이두 표기)에 추증했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봉했다. 국대부인은 왕비의 할머니나 어머니 호칭인데 박제상 셋째 딸 아경(阿慶)이 아버지가 구한 미사흔 왕자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21대 소지왕이 된 사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사람들은 치술령 아래 신모사(神母祠)라는 사당을 지어 박제상 부인을 기렸다.

두동면 만화리 유적지 한국 선도의 고장 박제상 유적지에 오후 4시 반경에 도착하니 박제상기념관, 치산서원, 박제상 부인 사당이 나란히 있다. 유적지는 울산광역시역사기념물 1호다. 기념관에는 삼국의 건국 연도를 포함한 역사 연표와 박제상 관련 사실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러나 실물이 없으니 내용은 소략할 수밖에 없다. 박제상이 지은《요정징심록연의(要正澄心錄演義)》 중 <부도지(符道志)> 영인본과 번역서 등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특이하게도 서기 415년(을사년)에 만든 광개토태왕 명문이 쓰인 호우(壺杅 청동 그릇) 한 점이 전시되어 있다.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호우 뚜껑과 바닥. 사진 한국유라시아연구원


치산서원(鵄山書院) 자리는 원래 신모사 터다. 치산서원 뜻은 올빼미 서원이다. 특이한 이름이다. 영조 21년(1745) 영해 박씨 주도로 서원을 건립하여 박제상과 부인 및 두 딸을 제향하다가 1864년 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 1991년에 울주군에서 현재 서원을 복원했다. 서원 건물 배치는 조선 서원의 표준을 따랐다. 그런데 이상하다. 선가(仙家) 박제상이 성리학 학교 서원에 배향되어 있지 않은가! 선도와 성리학은 상극인 사상이다. 선도는 평등 세상을 지향하나 성리학은 신분제를 하늘이 정한 의리로 여기기 때문에 서로 양립할 수 없는데! 저간의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배향된 박제상 영혼도 별로 유쾌하지 않으리라.

박제상 부인을 모신 신모사는 서원 뒤에 있다.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다. 시간이 늦어서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인터넷에 뜬 아래 사진을 첨부했다. 또 의문이 떠오른다. 부인은 실성왕 공주이고, 박제상의 근거지는 양산 일대인데 왜 여기가 박제상 유적지인가? 생각해 보니 아마도 공주가 부왕으로부터 이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근거지가 되었을 것이다.
 

 ▲ 박제상 부인 사당(출처 : Yeongsik Kim blog)


울산과 청도가 우리 고대사에서 선도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오늘 확실히 알았다. 원광법사, 신라 회랑, 선도의 스승 박제상의 고장이 이 지역이다.

5시 넘어 언양 읍내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시골 소읍 모텔이지만 방이 넓고 정갈했다. 1980년대 언양 봉계에 불고기 촌이 성황을 이루자 언양 일대에 고기집 식당이 주산업처럼 되었다. 필자가 부산에서 교수로 근무했기 때문에 잘 안다. 숙소 근처 오래된 불고기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정갈해서 좋았다. 숙소에 돌아와 서로 답사 소감을 공유하고, 연구 주제를 토론하고, 가벼운 음주로 유쾌한 시간을 보낸 후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12월 6일)아침 7시 30분에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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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등록일
2026-01-1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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