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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인근이 선도의 본고장, 선도와 불교의 융합 현장이었으며, 화랑 문화가 창달된 지역

 

<선사시대와 고대 역사 유적 답사>

 

 

울산 인근이 선도의 본고장, 선도와 불교의 융합 현장이었으며, 화랑 문화가 창달된 지역

 

 

 

울산 지역 - 선‧불(仙‧佛) 융합과 화랑도 문화의 현장②

 

 

 

   허성관(한국유라시아연구원 원장)

 

 


일찍 일어나 숙소 주변을 잠시 산책했다.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났는지 새삼 놀랍다. 30여 년 전 조그만 시골 소읍 언양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냇가 주변도 잘 정비되어 있고, 거리도 깨끗하다. 주민들이 모두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예정대로 7시 30분에 언양 옛 시장 안 설렁탕집으로 아침 먹으러 갔다. 역시 세월이 쌓여야 노하우가 축적되는 지 오래된 식당이라 맛이 좋았다. 오늘 첫 목적지 천전리 암각화와 반고사 터로 향했다.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川前里) 암각화(국보 147호)와 대곡리 반구대(盤龜臺) 암각화(국보 285호)는 ‘반구천 암각화’라는 이름으로 2025년 7월 12일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반구천은 태화강 지류다. 상류에 천전리 하류에 대곡리가 있고, 암각화는 반고천에 면한 절벽에 새겨져 있다. 반구천 하류에 사연댐이 있어 반구대 암각화는 댐 수위가 낮아 암각화가 물에 잠기지 않아야 배를 타고 들어가서 볼 수 있기에 이번 답사에는 갈 수 없다고 한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한참 지나 천전리 암각화 입구에 도착했다. 지난 봄 여기에 왔을 때는 복숭아 꽃이 만발했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다소 을씨년스럽다. 일찍 도착한 지라 입구가 한가하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반구천이 휘돌아 나가는 중간 절벽에 암각화가 있다. 그림 오른쪽 시멘트 다리를 건너 언덕배기를 좀 올라가서 다시 절벽을 내려가야 암각화를 볼 수 있다. 암각화가 있는 절벽에서 냇물 건너편은 암반이고 거기에 공룡 발자국도 남아 있다.
 

 ▲ 천전리 암각화 원경. 출처 : 입구 안내 사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강이 휘돌아 흐르는 동산 절벽 기다란 바위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강물 수위가 조금 높다면 절경일 것이다. 평평한 암반도 제법 넓다. 숲이 울창하여 여름에는 좋은 피서지가 될 수 있겠다. 옛날 옛적에 하늘에 제사 지내던 소도(蘇塗)였을 수도 있겠다. 이런 범상치 않은 장소에 그림을 새기기에 알맞은 암벽이 있어 암각화를 그렸을 것이다. 천전리 암각화는 폭 10m 세로 3m 정도 크기로 앞으로 15도 기울어진 바위에 800여 점 그림과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때 새긴 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암각화를 그린 시기는 신석기부터 청동기까지로 밝혀졌다. 그림 종류는 각종 동물상과 기하문(마름모, 동심원, 지그재그문)이다. 특히, 마름모와 지그재그 문은 후기구석기 알타이 바이칼 문화를 계승한 흑룡강 하류 신석기 문화의 생명 상징문이다. 이 문화가 환동해권으로 확산하면서 이곳 반구천 암각화는 선도제천 문화의 구체적인 발현으로 만개한 것이라는 정경희 교수 설명이다. 사실 대곡리와 이 천전리 암각화는 그 구성의 짜임새와 사실적 표현이 뛰어나서 그림 자체가 우리나라 회화사의 기원이라 할 만하다. 인류 문화사에 참으로 소중한 그림이기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림 아래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새긴 글이 신라 명문(銘文)이다. 명문은 서기 525년 법흥왕의 동생 사도지 갈문왕(徙夫智葛文王)과 그 누이가 이곳에 유람왔었고, 그가 죽은 후 부인과 아들 심맥부(深麥夫)가 서기 539년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여기 왔었다는 기록이다. 심맥부는 법흥왕을 이어 즉위한 진흥왕(재위 540∼576)이다. 진흥왕은 법흥왕 조카였고, 이름이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였다고 전한다. 신라 왕실에서 다녀간 곳이니 자연스럽게 이곳이 명승지가 되었을 것이고 이어 화랑들의 수련 장소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왕족이 왜 여기 왔는지 궁금해서 명문을 찾아보니 ‘沙喙部葛… 文王覓遊來始得見谷’으로 시작한다. ‘사훼부 출신 갈문왕이 찾아 놀러 와 처음으로 이 골짜기를 보았다‘고 번역해 놓았다. 覓(멱)이 ’찾는다‘는 뜻이 있으나 覓遊來(멱유래)를 ’남쪽으로 유람와서’로 번역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두 표기에서 覓을 남쪽을 의미하는 글자로 쓰고 ‘마’로 읽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이두를 만들었다고 전하는 설총(薛聰, 655∼?) 이전에 이두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사진 국가유산청


암각화를 떠나 없어진 반구사(盤龜寺) 터를 찾아보기로 한다. 기록에는 반구사 터에 1712년 반구서원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지금 반구서원은 사연댐을 건설하면서 1965년 옮겨 지은 것이라서 옛 반구사 터에 있지 않다. 안내원 말로는 암각화 맞은편 강 건너가 반구사 터라는데 지금은 복숭아 밭이다. 평지가 너무 좁아 절이 있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왜 없어진 절터를 찾았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아는 원효(元曉 617∼686) 스님이 주석했던 절이기 때문이다. 원효 스님은 중국으로 유학을 가는 길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대각한 분이다. 귀족 중심 신라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한 분이다. 특히 종파주의적 불교를 융합하는 데 앞장섰다. 원효 스님의 일심(一心)사상, 화쟁(和諍)사상, 무애(無㝵)사상은 오늘날에도 존숭하는 가르침이다. 신라 고승 원광(?∼640), 자장(慈藏, 590∼658), 원효 스님이 비슷한 시기 울산 지역을 중심으로 설법했다는 사실을 이번 답사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이 신라 사상계 중심이었던가 보다. 울산은 신라의 대외 무역항으로 해외 정보 유입 창구여서 인재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천전리 암각화에서 다음 답사 목적지 선바위로 향했다. 선바위는 서 있는 바위다. 울주군 범서읍 두동리 태화강에 우뚝 서 있는 큰 바윗덩어리다. 강변이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주차장이 널찍하다. 나라 경제가 발전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잘 꾸며 놓았다. 강에 수량이 많지 않아 장엄한 모습은 아니다. 강 건너편 선바위 옆에 백로인지 해오라기인지 구분이 안 되는 큰 새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거린다.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인사인가 보다. 선바위는 높이가 33m 둘레가 46m이고 꼭대기 폭이 3m로 우람하다. 선바위 아래 강물이 백룡담(白龍潭)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흰 용이 살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우람한 바위가 있고, 용이 살며,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니 민중들에게는 성스러운 장소였을 것이다. 게다가 강변이 넓으니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다. 이러니 아득한 옛날 사람들이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터였을 수도 있겠다.
 

 ▲ 선바위. 사진 한국유라시아연구원

 


선바위 뒤로 산에 정자가 보인다. 학성(울산 옛 명칭) 이씨 집안 용암정(龍巖亭)이라고 한다. 필자의 절친한 동료 교수 한 분이 학성 이씨다. 생각해 보니 이곳 범서읍 학성 이씨 가문에서 대일항전기 걸출한 독립투사 한 분이 나왔다. 이관술(李觀述, 1900~1950)이다. 입암(立巖)리가 그의 고향이니 바로 이곳 선바위 주변 마을 출신일 것이다. 이관술은 여동생 이순금과 함께 대일항전기 사회주의 계열 혁명가이자 탁월한 대중적 지도자로서 전설적 독랍투사였다. 광복 후 해방공간에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남았고 북한 정권 수립에 협력하지도 않았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중 6.25가 발발하자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 사위와 동생도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당했다. 그의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이 2015년에 있었다. 사회주의자였지만 이관술이 꿈꾸던 광복된 조국은 북한에서 수립된 공산주의 정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선바위에서 북동쪽으로 길을 잡아 잠시 후 범서읍 구영리 장구산성 올라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산이 높지는 않으나 노인으로서 오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체력 단련 삼아 천천히 오르기로 한다. 《삼국사기》는 신라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재위 196∼230) 때 가야연맹 포상8국 중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 세 나라가 연합하여 신라에 침입했는데 갈화성(竭火城)에서 물계자(勿稽子) 지휘하에 승리했다고 전한다. 물계자는 한국 선도의 큰 스승이며 박제상 아버지다. 장구산성이 갈화성이라고 한다. 장구산은 바다로 침입한 적군이 태화강을 건너 서라벌로 진격하는 최단 거리에 있는 요충지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 주변에 성곽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쉬엄쉬엄 정상에 올라서 보니 사방을 감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으로 산성을 쌓았음직한 곳임을 알겠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장구산에서 내려오니 몸이 가볍고 상쾌하다. 아래 사진은 장구산성 오르는 안내판인데 ‘산성만디‘가 장구산 정상이다. ‘만디‘는 산꼭대기를 의미하는 정겨운 경상도 말이다. 안내판 내용으로 보아 지자체가 장구산성을 잘 모르는 것 같다.
 

 

 ▲ 장구산성 안내판. 사진 한국유라시아연구원


점심을 해결하고자 식당으로 향했다. 비빔밥 전문집 ‘와방’인데 음식이 입에 맞았다. ‘태화강 국가정원’으로 길을 잡았다. 대한민국 100대 관광명승지 중 하나로 언론에 널리 알려진 곳이다. 태화루에 올라 바라보니 빼어난 절경에 조성한 공원이다. 태화강이 휘돌아 나가는 곳 하천부지를 이용하여 대숲, 각종 꽃밭, 탐방길, 볼거리 등을 배치했다. 울산 시민이 자랑할 만한 공원이다. 이제 선진국 초입에 들어선 나라이니 이렇게 근사한 공원을 만들 수 있음을 새삼 실감한다.

우리가 이곳에 답사온 이유는 여기가 옛 태화사(太和寺) 터이기 때문이다. 태화사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643년 창건한 절로서 신라 10대 절 중 하나였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부처님 진신사리 100과를 가져와 황룡사 9층탑, 태화사,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 3/1씩 봉안했다고 하니 당시 태화사가 대단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화사는 고려말 또는 조선 초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관련 기록은 없다. 2014년 울산광역시는 태화사 건물 중 태화루를 복원했다. 여름에 태화루에 오르면 신선이 될 듯하다.
 

 ▲ 태화루. 사진 한국유라시아연구원

 


선덕여왕은 자장 스님을 대국통(大國統)으로 봉해 불교로 나라를 통치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호칭인 율사(律師)가 시사하듯이 자장 스님은 엄격한 불교 계율을 정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님은 중국에서 산서성 오대산(五臺山)에 머물렀다. 오대산은 탁발선비(拓拔鮮卑)가 세운 북위(北魏 386∼534) 이래 문수신앙 성지였다. 2013년 이 오대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백두산보다 조금 높은 산인데 정상에 망해사(望海寺)라는 절이 있었다. “웬 바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구름바다였다.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대계》는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 태화지(太和池)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신라에서 불교를 중흥하라”고 당부받고 떠나려 하는데 용이 나타나서 “해동 신라국에 내 아들이 살고 있으니 내 아들을 위해 서라벌 남쪽에 부처님께 기도드리는 절을 지어 달라”는 간청을 들었다고 전한다. 귀국한 자장율사는 여러 곳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중흥했다. 아마도 태화사라는 절 이름도 오대산 태화지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자장율사가 신라에서 문수신앙을 설파하고 용신앙도 전파한 연유로 이 설화가 생겨났을 것이다. 태화루 아래가 황용연(黃龍淵)이다.

원광과 원효 스님을 중심으로 불교와 선도 융합이 진행되었으나 자장율사가 불교 계율을 엄정하게 세우고 문수신앙과 용신앙을 신라에 정착시킴으로써 선도의 자취가 불교에서 점차 지워졌을 것이라는 정경희 교수 설명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태화루 마루에 편한 자세로 불교와 선도의 융합에 관련된 논문 주제를 놓고 일행이 재미있고 의미 있는 토론 시간을 보냈다. 

오후 3시쯤 울산광역시 북구 연암동에 있는 환호(環濠)유적으로 이동했다. 울산 북구청 주변 연암나들목에서 방어진 가는 도로가 시작되는 오른쪽에 환호가 있다는 도로 표지판이 있었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구릉 정상 해발 65m 평지가 환호유적이었다. 환호는 둥글게 조성한 해자를 의미한다. 이 유적은 청동기 시대 유적이라고 한다. 구릉 정상 환호유적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 유적인데 BC 4000∼3500년 무렵 백두산 지역에서 시작되어 요서 우하량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청동기 시대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환호는 땅을 일정한 넓이와 깊이로 파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안쪽은 성스러운 제사 지내는 공간이다.
 

 

 ▲ 연암동 환호유적 정중앙(솟대가 있던 자리?)에 심은 나무. 사진 한국유라시아연구원


유적지에 올라보니 사방을 조감할 수 있는 좋은 위치다. 동쪽은 산 능선이 남북으로 이어지고 남, 서, 북쪽은 터져 있다. 환호는 내호와 외호 이중으로 조성되었는데 타원형이다. 내호 둘레는 260m 동서 길이가 76m이다. 외호는 내호와 10m 간격을 두고 둘레가 360m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호와 외호 자리에는 지면 높이와 같게 붉은 벽돌을 쌓아 표시하고 있다. 민무늬토기와 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환호유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규모가 큰 환호유적이다. 특히, 중앙에 큰 구멍이 발견되었는데 솟대를 세웠던 자리로 추정된다고 한다. 서기전 2500년 무렵 이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 지내고 술을 마시고 춤추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울산 지역 역사가 예사롭지 않다.

이번 여행 마지막 답사지 울산 남구 신정동 소재 은월사(隱月祠)로 향했다. 신라 영웅 김유신 장군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 518∼579)과 아버지 김서현(金舒玄 생몰년?)을 모신 사당이다. 도착해보니 문이 잠겨서 들어가 볼 수 없다. 도심지에 건물로 둘러싸인 사당이다. 사당 이름 은월(隱月)은 ‘숨은 달’이라는 뜻인데 두 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다. 알려진 바와 같이 김무력은 금관가야 마지막 구형왕 아들이다. 김무력은 백제 성왕이 전사한 554년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각간(角干)이 되었다. 김서현은 629년 낭비성 전투에 아들 김유신과 함께 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대량주 도독 등을 지냈다. 그래서 은월사 정문 옆에 세운 비석에는 ‘金大角干金大都督二公祭壇碑’라고 쓰여 있다. 은월사를 언제 세웠는지 기록이 전하지 않으나 아마도 신라 말기일 것이다. 대원군 집권 시 훼철되었다가 1989년 복원되었다.
 

  ▲ 은월사. 사진 울산 남구청

 


그런데, 울산 지역과 김유신 가문이 어떤 인연이 있어 여기에 사당을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전하는 얘기로는 태화강 하류에 김무력과 김서현 묘가 있었으나 찾을 수 없어 태화강이 바라 보이는 이곳에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김무력 묘는 양산 통도사 경내에 있고, 김유신 묘는 경주에 있다.

답사를 마무리하고 울산역으로 향했다. KTX 저녁 6시 23분 서울행 기차 시간에 여유가 있다. 동행한 신종근 박사, 소대봉 박사와 함께 울산역에서 현지 막걸리를 곁들여 저녁을 해결했다. 막걸리 맛이 정말 일품이다. 울산 인근이 선도의 본고장이었고, 선도와 불교의 융합 현장이었으며, 화랑 문화가 창달된 지역이었음을 이번 답사를 통해 알았다. 골골에 역사가 스며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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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6-01-1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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